2007년 01월 20일
척구검斥狗劍
원평元平 연간에 제齊나라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지방의 자사인 공公 가를 죽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10여년이나 무술을 연습하여 근방에서 당해낼 자가 없게 되자, 이제 공가를 죽이고자 마음 먹었다. 그런데 소문에 공가가 사용하는 검이 천하의 명검이라 일반적인 무기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이 젊은이는 공가의 명검을 당해낼만한 명기名機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서, 무당산 자락에 사는 한 노신선이 보기 드문 예기를 내뿜는 보검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젊은이는 무당산으로 향했다.
험한 산을 올라 깊은 계곡을 지나자 곧 주위가 온통 안개로 둘러 싸인 산중의 작은 암자가 보였다. 젊은이가 주위의 경관에 압도되어 감히 문을 열지 못하고 울타리 바깥에서 손님이 왔음을 고했다. 잠시 후 암자의 문이 열리고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희고 긴 수염의 노인이 나왔다. 젊은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하고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를 알렸다. 노인은 잠시 말없이 젊은이를 바라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방 안에 정좌하자 노인이 손수 깎은 듯한 나무 사발에 차를 내 왔다. 차도 손수 기른 것인 듯,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었다. 차를 한잔 들자 노인이 물었다.
"젊은이를 보아하니, 내외가 상통하고, 상하가 조화로우며, 손발이 안정되어 있고, 눈에는 총기가 돌며, 귀는 사방으로 열려있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니 이는 인세에 보기 드문 고수라. 어찌하여 신외지물身外之物에 의지하려 하는가?"
이에 젊은이 대답하길,
"과분한 평은 감사하오나, 설령 저의 무술이 공가의 부하를 모두 뚫고 그를 찌를 수 있을 만큼 날래다고 해도 그가 지닌 명검이 날카로워 범상한 병기로는 그를 해할 수 없다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을 것이온데 마지막의 순간에 명검에 가로막혀 그를 찌르지 못한다면 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노인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벽장을 열고 검은 비단에 싸인 길다란 물건을 꺼내왔다. 비단자락을 펼치자,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예기를 내뿜는 장검이 보였다. 노인은 잠시 말없이 검을 바라보다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젊은이 의아하게 여겨 물었다.
"어째서 우십니까?"
노인은 눈물을 훔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장검의 이름은 척구검斥狗劍이라고 하네. 오래전 오吳나라의 명장名匠이 자객에게 주어 나라의 원수를 찌르기 위해 만든 검일세. 그래서 그러한 이름이 붙은걸세."
젊은이는 묵묵히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검은 자객이 궁궐 담을 넘을 때 발각되어 체포되었기에 본래 해하려 하던 대상을 향해 휘둘러지지는 못했네. 후일 이 검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몇십 년 전, 나의 스승의 손에 들어왔네. 나의 스승은 본래 나의 사조를 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자질이 달려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네. 그러다가 이 명검이 한 지방 자사의 소장품이라는 말을 듣고 목숨을 걸고 관아의 담을 넘어 이 검을 손에 넣었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젊은이는 이 노인의 스승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다고 여겼다.
"검을 손에 익숙하게 휘두를 수 있게 되자, 나의 스승은 곧 원수가 살고 있는 집에 쳐들어갔네. 스승은 이 검에 자신이 있었기에 원수의 부하 수십 명을 도륙하였네, 그런데 막상 그 원수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네, 점점 자신을 잡으러 오는 자들이 많아지자 나의 스승은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오게 되었는데, 격전의 와중에 우연히 그 원수의 방에 걸려 있는 검 한 자루를 손에 넣었네. 그렇게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나의 스승은 추격을 피해 동해로 갔고, 거기서 어부에게 부탁하여 근처의 작은 섬으로 몸을 피했네. 그런데 그곳에는 두 쌍의 늙은 부부가 초막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한 부부는 젊고 장성한 아들이 있었고, 한 부부에게는 어린 두 딸이 있었네. 나의 스승은 이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그곳에 머물기로 했네. 그러나 잠시라는 생각도 시간이 흘러 희미해지고, 나의 스승은 그곳에서 3년간이나 지내게 되었네. 이 두 늙은 부부들은 나의 스승을 박대하지 않았는데, 이 섬에는 젊은 남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두 딸들을 모두 시집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즉 큰 딸을 나의 스승에게 시집보내려는 의도였네. 그렇게 지내던 도중 이 두 소저가 자라서 각기 열 여덟살과 열 일곱 살이 되었네. 섬에서 친구도 없이 자라난 것 치고는 예의와 염치를 알았고, 그 섬의 특산인 진주조개를 많이 먹어서인지 피부도 고왔네. 나의 스승과 이 두 소저, 그리고 다른 부부의 젊은 아들은 서로 매우 친하게 되었고, 나의 스승은 이 젊은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도 했네."
노인은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 두 딸의 부친이 나의 스승을 불러 이야기를 꺼냈네. 두 딸 중 누구와 혼인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지. 그러나 나의 스승은 이 두 자매를 똑같이 동생처럼 대했기에 이 노부부가 자신들의 딸 중 하나를 나의 스승과 혼인시키고 싶어한다는 눈치를 알면서도 그리 내켜하지 않았네. 나의 스승이 쉬이 대답하지 않자 이 노인은 자신의 두 딸에게 물었네. 그러자 이 두 딸은 동시에 나의 스승이 아닌 다른 부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네. 노인은 깜짝 놀라서 나의 스승을 싫어하느냐고 물었네. 그러자 이 두 딸의 대답이 가관이었네. 그 둘은 서로 나의 스승을 더 좋아하지만, 자신의 자매가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아 서로에게 나의 스승과 혼인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었네. 결국 그 자리에서 두 자매는 옥신각신 하게 되었고, 나의 스승은 자리를 피했네. 노인이 나의 스승의 뒤를 따라 나왔네. 그 노인은 물었네. '내 두 딸이 모두 자네를 더 좋아하다니...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나의 스승은 그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네. '본디 저는 정처없는 떠돌이 입니다. 원래 저라는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이대로 이곳에서 두 소저 중 한 명과 결혼하여 다른 한쪽을 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둘을 모두 아내로 맞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나의 스승은 그 길로 섬을 떠났네. 떠나기 전에, 반대편 초막에 들려 친형제처럼 지내던 젊은이에게 원수의 방에서 얻은 검을 주며 두 소저를 부탁했네. 이 젊은이는 착한 천성을 지녀서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으나 나의 스승은 듣지 않았네. 게다가 자신에게는 아직 못다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
노인은 말을 멈추고 손을 뻗어 방문을 살짝 열어 젖혔다. 바깥은 안개로 가득 들어차 앞 한치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기중의 습기가 방 안에 까지 밀려들어왔다.
"그 후로 나의 스승은 이 척구검을 들고 원수의 행방을 뒤쫓았네, 2년여가 걸려 원수의 행방을 알아냈는데, 정적의 모함에 걸려 두 다리가 잘리는 벌을 받고 오지로 유배되었다고 하더군. 나의 스승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은거하였고, 나는 그 뒤에 나의 스승의 제자가 되었네. 이 척구검은 나의 스승에게 물려 받은 것인데, 이름과는 달리 단 한번도 반드시 죽여야 하는 원수를 찔러 본적이 없는 물건일세. 자네가 이 검으로 부모의 원한을 갚는다면 이 검의 첫 사용자가 되겠군."
노인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척구검을 살짝 밀어 젊은이의 발치에 놓았다.
"자네의 사정을 들으니, 이 검에 얽힌 옛 이야기가 떠올라서 금새 눈물이 흐르게 되었네, 내 추한 꼴은 못 본 것으로 하게."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 앉았다.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검을 갈무리하고 절을 한 뒤에 암자를 나섰다.
한 달여가 지나고, 조용히 은둔하고 있던 노인의 귀에 한 젊은이가 명검을 들고 자사를 죽이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노인은 이에 집안을 정리하고 찬물로 목욕을 한 뒤 깨끗한 옷을 입고 방안에 정좌해 있었다. 노인이 소문을 들은지 오래 지나지 않아 네 명의 건장한 사내가 암자에 찾아왔다. 그들은 감히 소리를 내어 묻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서
"노신선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 노인은 천천히 암자를 걸어나왔다.
"그 젊은이가 실패했다고 하더구먼."
이 네 명의 장한은 뭐가 그리 죄송한지 노인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이 노인은 지난 30여년 간 이 근방의 노신선으로 추앙받아왔기 때문이었다.
"긴 말 말고 가세. 내가 가지 않는다면 자네들만 경을 치게 되겠지."
노인은 네 명의 장한에게 둘러싸여 주자사의 관아로 갔다. 노인은 결박도 지어지지 않은 채 의자에 앉혀졌고, 처참한 몰골을 한 젊은이가 꽁꽁 묶인 채 끌려 나왔다. 그리고 공 자사가 척구검을 손에 든 채 당상에 나아왔다. 노인은 공 자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젊은이를 향해 물었다.
"자네의 무공은 입신의 지경이었는데 어찌 실패하였는가?"
젊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때 공 자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무공은 나를 억누를 정도로 탁월하였지만 이 한 자루 검은 나의 검을 이겨내지 못했소."
공 자사가 척구검을 뽑아 보였다. 척구검은 예기를 잃고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노인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이 되어 공 자사를 바라보았다. 공 자사가 뒤에 손짓했다. 그러자 노복들이 또 한 자루의 검을 가져왔다.
"이것이 내가 사용하던 검이오."
공 자사는 그 검을 뽑아 보였다. 놀랍게도, 그 검도 빛을 완전히 잃고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노인은 공 자사의 검을 보다가 문득 외쳤다.
"설마 그 검은..."
공 자사는 진중하고, 무거운 안색이 되어 대답했다.
"나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시는데, 그분들께 물려받은 검이오. 그분들은 이 검을 의오빠에게 받았다 하셨소."
노인은 오랜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령아, 경아. 너희들의 아들을 지켰구나."
말을 마치자마자, 노인의 몸이 흐릿한 안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그 안개마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은 온데 간데 없었다. 텅 빈 의자위 허공에서 희미하게 이런 말이 들려왔다.
"정인은 온데간데 없는데, 이 마음 한구석의 티끌은 무엇인고?"
노인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마저 끊기자 공 자사는 긴 탄식을 내뱉으며 젊은이를 향해 척구검의 부러진 조각을 던져준 후,
"내 의백부의 장문제자를 어찌 해할 수 있겠는가? 그를 풀어주어라."
라고 말하고 자신의 부러진 검을 집은 후 몸을 돌려 내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졸들이 그때까지 멍하니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젊은이를 묶은 포승줄을 풀어 주었다. 젊은이는 부러진 척구검을 집고 비틀거리며 관아를 나서서 갈데 없는 기나긴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사족/ 몸살이 도져서 머리가 깨질것 같이 아픈 가운데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나머지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한 신선 같은 노인이 검을 들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기억나더군요. 그 장면으로부터 적어 본 단편. 머리가 너무 아파서 문장 수정은 없습니다.
# by | 2007/01/20 18:37 | Write | 트랙백 | 덧글(3)



